정호승·안도현

그는 / 정호승

마지막 잎새 2011. 8. 4. 05:31

  

    그는


    그는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을 때
    조용히 나의 창문을 두드리다 돌아간 사람이었다
    그는 아무도 나를 위해 기도하지 않을 때
    묵묵히 무릎을 꿇고
    나를 위해 울며 기도하던 사람이었다

    내가 내 더러운 운명의 길가에 서성대다가
    드디어 죽음의 순간을 맞이했을 때
    그는 가만히 내 곁에 누워 나의 죽음이 된 사람이었다

    아무도 나의 주검을 씻어주지 않고
    뿔뿔이 흩어져 촛불을 끄고 돌아가버렸을 때
    그는 고요히 바다가 되어 나를 씻어준 사람이었다

   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자를 사랑하는
    기다리기 전에 이미 나를 사랑하고
    사랑하기 전에 이미 나를 기다린

     

    -정호승-