정호승·안도현

슬픔이 기쁨에게 / 정호승

마지막 잎새 2011. 10. 7. 07:52

 




슬픔이 기쁨에게
정호승


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
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

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개 놓고 살아온
추위에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
귤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
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주겠다

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
단 한 번도 평등하게 웃어주질 않은

가마니에 덮힌 동사자가 다시 얼어죽을 때
가마니 한 장조차 덮어주지 않은
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

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
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

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
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
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
눈 그친 눈 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

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
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

 

 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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